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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스트 기획_공연일기] 어몸말 <이 몸이 만든 드라마> by이보다

seoulfringe2021-08-2817

 

불편함조차 잊은 당신에게

 

언제부터였을까, TV를 마음 놓고 볼 수 없게 된 것이. 나를 뺀 모두가 즐거워하니 오히려 나 자신이 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웃긴가?’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예민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왜 이렇게 불만이 많냐는 말도, 세상을 삐뚤게 본다는 말도, 그렇게 불편해서 어떻게 숨은 쉬냐는 말도 들어보았다. 네가 당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는 말.

 

생각해보자. 정말로 자신의 일이 아닌지. 재미에 담긴 불편함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주 손쉽게 당사자성을 찾을 수 있다. 남자 개그맨들이 여장을 한 모습을 보았을 때, 알바 사장이 미투드립을 쳤을 때, 여자 연예인들이 허벅지 위로 올라가는 교복 치마를 입고 섹시댄스를 추었을 때. 이걸 보고 단 한 번도 불편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어떤 시각으로 그것들을 감상했는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매체를 통해 비쳐지는 여성의 모습들을 객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주체가 된다면, 당신은 삽시간에 불편해질 것이다.

 

그래서 못 보기 시작했다. 예능프로그램을, 한국 영화를, 드라마를. <어몸말>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보는 수많은 예술작품들 속 드라마에 대해서. 드라마의 불편함에 대해서. 그는 자신의 말이 세상에 어떠한 변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발화 작업이 변혁의 초석이라고 느껴졌다. 마지막에 언젠가 그런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고 말을 하는 부분에서는 거의 확신했다. 언젠가는 그가, 또 내가 원하는 드라마들이 지겨울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칠천칠백칠십칠에서 출발하는 그 이야기처럼, 언어가 끼어들지 않아도 모두가 그 상황을 훤히 볼 수 있을 만큼, 당연한 클리셰로 자리 잡길 바란다.

 

공연 중 가장 오감을 사로잡았던 장면은 당연히 친다라는 동사를 수많은 변주를 통해 보여주었을 때였다. 땅을 치고, 주먹으로 치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벽을 치고, 문을 치고, 밀치고. 그 모든 친다는 드라마에 가장 흔히 등장하는 동사 중 하나이다.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건 대부분 폭력적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아주 익숙하다. 심지어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손쉽게 사랑으로 변하기도 한다. 폭력이 사랑으로 변한다니,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아주 익숙해져서,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장면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주인공이 이별을 고한 여자주인공의 집 앞에서 문을 부술 듯 두드려대는 장면을.

 

폭력뿐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단어들도 드라마 속에서 사랑으로 이어진다. 만남->사랑, 이별->사랑, 식사->사랑, 고소->사랑, 실종->사랑, 사건->사랑, 협력->사랑, 전쟁->사랑, 대립->사랑, 갑질->사랑, 취업->사랑. (이 보기만으로도 당신은 수많은 드라마,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드라마를 볼 때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쟤가 여자주인공이고 얘는 남자주인공이네. 둘이 곧 사랑에 빠지겠네. 내지는 얘네 둘은 서브커플이네.”

 

우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보기들이 있고, 그 모든 보기들은 하나같이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건 꽤 재미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사랑은, 그 말대로 드라마틱하고 다시는 없을 천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구질구질함, 감정과잉, 기대, 실망, 지쳐감 등이 제거되어 있다. 드라마는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폭력마저 미화되고 만다. 어쨌든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을 사랑하니까. 둘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그리고 그게 모두가 바라는 진짜 사랑이니까. 정말 그럴까?

 

정말 그게 사랑인걸까? 아니, 정말 그게 사랑인 게 정당한가? 당신은 드라마가 끝난 이후를 떠올려본 적이 있는가. 여자주인공이 헤어지자고 했을 때, 집 앞에 찾아가 문을 미친듯이 두드려대던 그 남자주인공은 10년 후에 달라졌을까? 그때 여자주인공이 이혼을 요구한다면? 그 장면마저 로맨틱하다고 느끼는가? 서로 으르렁대며 싸움과 사랑을 반복하던 이들의 10년 후는? 아이들 앞에서도 싸움이 이어진다면? 그 장면도 알콩달콩해 보이는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은 무책임하다. 당신도 그동안 달콤한 떡밥에 취해 불편함조차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어몸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당신은, 모든 드라마 속 친다가 불편해질 것이다. 그건 사실 진작 불편했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불편함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불편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지겨울 만큼 당연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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