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호 비평이 뭔지 우리는 물루지
- 목차 -1) 물• <0156> 0156• <gps> 민수민정2) 루디• <국립극단원> 매머드머메이드• <우주마인드 단편 프로젝트> 우주마인드 프로젝트• <막 만든 춤> 송지연• <gps> 민수민정3) 지혜• <어쩌라고> 64j, <키오스크는 어려워> 프로젝트팀 얼레벌레 1) 물-0156 / 0156 : 승자와 패자가 없는 두 사람의 놀이 퍼포먼스 0과 1 그리고 5와 6 대상이 부재한 말은 어디에 닿을 수 있나. 윤아와 진우 두 사람의 말은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듯 바라보며 눈싸움을 이어가도, 등을 맞대고 앉아도 그들은 다른 스펙트럼 속에 존재한다. 몸이 맞닿아 있음에도 그들은 단절되어 있다. 잠시나마 입 밖으로 나와 허공을 부유하던 말들은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말하지 않기를 선택하며 이어지던 팽팽한 놀이를 끝내고 둘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드디어 ‘말’이라 부를 수 있는 말을 한다. 두 개의 입, 영 개의 귀. 말하는 이는 있지만 듣는 이는 부재하다. 부딪힌 말들은 조각나고 뒤섞인다. 관객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진심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스러져가는 걸 목격한다. 들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하고 싶은 말을 삼켜내는 순간들이 있다. 언젠가는 이 말을 전할 수 있길 바라며 마음 한 켠에 모아둔 말들. 내가 겁쟁이라서, 네게 입은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 같아 속으로만 몇 번이고 되내인 말들. 이제는 더 이상 전할 방도가 없음에도 그 자리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말들. 이 말들은 어디로 가나. 집단적 독백이 대화가 되는 순간 마음의 문은 다시 닫힌다. 애초에 듣지 못하게끔 뱉어내는 말들. “모르겠어”와 “글쎄”의 협주곡. 서로 다른 스펙트럼 속에서 둘의 말은 그저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둘은 계속 놀이를 이어간다. 다른 스펙트럼을 딛고 서 있는 서로를 바라본다. 아, 이것이 대화의 시작일까. -gps (global positioning story) | 민수민정: 민정의 프로젝션 맵핑과 민수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미디어아트 낭독극 기꺼이 길을 잃겠다는 다짐 좁은 계단을 지나 들어선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공간. 자리에 앉자마자 민수가 따라주는 작두콩차는 이들의 세계로부터 온 초대장 같다. 차를 홀짝이며, 활짝 열린 환대에 몸의 긴장이 느슨해지는 걸 느낀다. 그렇게 점 점 점 민수민정의 세계로 녹아든다. 공연 제목 gps의 마지막 글자는 system이 아닌 story의 약자다. 위치 확인 시스템이 아닌 위치 확인 이야기. 시스템의 여러 기준에서 자꾸만 밀려나는 존재들의 좌표는 이야기 속에서 반짝인다. 물속에 뿌리내리는 부상 수초처럼, 말랑한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언제든 서로에게 유영해 갈 수 있다. 관객과 함께 소리로 쌓아 올린 바다. 그 뒤로 일렁이는 풍경 속 하나의 문장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기 당신이 빌려 입을 수 있는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을 빌려 입고 방을 나서세요.’ 문장을 두어 번 읊조리는 새에 심장이 음악 소리만큼 크게 뛰기 시작한다. 공연장을 나서기 전까지 빌려 입을 몸을 찾아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 것만 같아 괜시리 두 눈을 크게 떠보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언젠가 이야기가 몸 바깥에 껍데기처럼 쌓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니, 어쩌면 나로부터 벗겨지기 시작한 허물일지도 모르겠다. 도마뱀 마냥 탈피를 하고, 소라게 마냥 새 껍데기를 찾아 입는다. 이야기와 문장들로 짜여진 몸. 나는 어떤 몸으로 공연장을 나서게 될까. 어쩌면 이 순간 이미 눈앞에서 일렁이던 문장들이 나의 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풍경들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자동차 경적, 딸랑- 종소리. 그 틈에서 민정과 길을 잃는다. 어디에서나 이방인이 되고 만다는 민정의 고백을 노이즈가 집어삼키고 다시 그 위에 민정의 노래가 포개진다. 잘못 탄 기차는 어느새 우주에 도착한다. 길을 잃어 마주하는 순간이 모두 이와 같다면, 함께 걷고 노래할 수 있다면, 언제든 기꺼이 길을 잃고 말겠다. 민수와 거리를 걸으며 이 공연은 끝이 난다. 민수와 민정, 관객을 차례로 비춘 카메라. 어둠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그 자리에 있음을 안다. 카메라를 들고 공연장 문을 박차고 나선 건 민수 혼자지만 우리는 그의 모든 걸음을 함께 걷는다. 언덕을 올라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함께 걷고 싶다는 말은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어쩌면 40여 분의 시간 동안 이들은 주파수를 맞추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같은 언어로 말하기 위해.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2) 루디-국립극단원 | 매머드머메이드 : 환상적인 이야기 뒤에서 현실을 이야기하는 1인극 사라지지 않는 것 “삐리삐리, 삐리삐리” 로봇이 로봇 소리를 내며 로봇스러운 자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봇은 스스로를 마지막 남은 국립극단원이라 소개한다. 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연극인가? 인간은 모두 사라져 버렸나? 죽어버렸나? 그것도 아니라면 국립극단원이 망해버린 걸까? 인간이 사라진 게 아니라 짧은 콘텐츠가 인간을 지배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공연도 점점 짧아지고 단순해지고 자극적으로 변하다가 사라져 버렸을지도. 시작부터 로봇은 관객에게 물음표를 쥐여준다.우습게도 로봇은 이제 로봇 소리를 내지 않는다. 더 이상 “삐리삐리” 하며 작동하는 로봇은 없다. 매머드머메이드는 “삐리삐리” 소리를 흉내 내는 인간도 없다고 말한다. 그게 로봇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산이 없는 나라의 아이들은 산을 세모가 아니라 ㅡ자로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극장이 사라지고, 문방구가 사라지고, 동네 슈퍼가 사라지고 있다. 슈퍼라는 말 자체도 입 밖으로 뱉은 지 꽤 오래됐다. 많은 게 사라진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봐야 할까? 시대의 흐름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로봇은 식물 관객과 인사를 나눈다. 조명은 어떤지, 에어컨 바람은 괜찮은지 묻는다. 식물 관객은 로봇을 만질 수 없기에 로봇이 식물을 만지며 터치 투어를 진행하기도 한다. 아, 관객은 우리(인간)가 아니었나.<국립극단원>은 전체관람가를 넘어 식물관람가(?)를 추구한다. 어쩌면 식물에게 더 재미있는 공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퍽 괴롭고, 외롭고, 슬픈 이야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지하철에서 비엔나 소시지를 먹는 아저씨. 올리브영이 들어설 자리에 극장이 들어설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 커튼콜이 끝나고 불이 다 꺼져도 연극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 죽어서 취업하려는 청년. 연극 안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로봇은 다양한 사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드론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로봇은 사람에 가까울까, 드론에 가까울까? 경계해야 하나?환상처럼 등장한 비엔나 아저씨는 환영처럼 사라졌다. 마치 “삐리삐리”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로봇이 등장했다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올리브영이 들어서자 극장이 들어설 거라는 희망을 품은 사람도 사라졌다.모든 건 사라진다. 마지막 남은 국립극단원도 곧 사라지겠지. 다행인 건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매머드는 사라졌지만 존재한다. 머메이드(인어)도 마찬가지. 우리는 여전히 매머드를 볼 수 있고, 머메이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연극 안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불행한 현실을 살까? 슬퍼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연극이 끝나도 연극 속에서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슬퍼해야 하는 건 어디서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심장이 뛰지만 살아있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존재. 지금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라는 걸 증명하는 이들. 식물에게 말을 건네는 로봇의 품이 더 따뜻할지도 모르겠다.‘에게’는 사람과 동물 따위에 붙는 조사라고 한다. ‘식물에게’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매머드머메이드는 말한다. 식물에게 말을 거는 로봇. 로봇의 공연을 보는 식물. 식물 관객과 숲을 먹어 치우는 인간 중 누가 더 사람다운가? 로봇답다는 건 무엇이고 사람답다는 건 무엇인가? -우주마인드 단편 프로젝트 | 우주마인드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연극인 척 하는 완벽한 블랙 코미디 연극이것도 비평이 되나? 나는 단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몰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니와 단편 특유의 애매하게 끝맺는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마인드 단편 프로젝트>는 사랑스러웠다. 너무나도 쉽고 유쾌하게 나의 편견이 깨졌다.제목을 선점하기 위한 제목 발표회. 과거 공연 모음집.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 대학생 시절 동아리 이야기. 토론이란 무엇인가. 여러 단편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연이다. 말장난을 섞은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두 배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말장난을 늘어놓는다. 눈길을 사로잡는 이미지는 없음에도 집중하게 된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단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웃길 수 있던가? 남편, 남의 편, 내 편, 네 편, 송편과 절편. 글로 적어 보니 별로 웃기지 않는다. 마치 인생이 걸린 시험을 보는 것처럼 진지하던 그들의 표정을 다시 보고 싶다.그런데 어쩌면 말장난이나 농담 따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말 진지했다. 내용도 웃기지 않았다. 유머와 진지함. 이 공연에서 주가 되는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진지함이다. 유머는 덤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참을 웃었다. 공연을 본 후 나도 말장난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말 진지했다면 내 웃음은 비웃음이 되는 걸까?인생에도 황금비율이라는 게 있다면 유머의 비중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지 생각해 본다. 답은 이 공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딱 이 정도 유머라면 퍽퍽해도 삶을 살아갈 맛이 날 것 같다.우주마인드 프로젝트의 오랜 팬에게 이번 공연이 지난 작품들에 비해 매우 진지한 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이보다 더 웃겼다면 내 배꼽은 몇 번이고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배꼽을 줍느라 공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모든 게 짧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릴스, 숏폼, 쇼츠, 10줄 소설, 베스트 셀러 자리를 차지한 단편집. 진지함은 구물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오죽하면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을까.우주마인드 단편 프로젝트는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느꼈던 게 아닐까? 유행을 따라가는 척 했지만 사실 그들은 진지한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건 결코 웃고 넘어가면 끝나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니다. 블랙 코미디도 아니다. 좌절하는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에 가깝다.쇼펜하우어가 내세운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이야기할 때 웃음기는 단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았다. 아마 쇼펜하우어도 진지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쇼펜하우어도, 그 글을 인용하고 읽어야만 했던 배우도 씁쓸함 섞인 진지함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논쟁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는다. 무엇을 위한 논쟁인가. 무엇을 위한 데모인가. 무엇을 위한 공연인가. 토론은 대체 무엇을 위해 하는가. 어찌 점점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가. 다양성의 시대라고 하는데, 다양하게 인간을 나누는 세상이 되고 있지는 않나.관객을 웃기기 위해 배우는 눈물지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울면서 해야 하는 이야기를 남들을 웃기면서 하다니. 그런 의미에서 이 공연은 블랙 코미디라고 볼 수 있으려나.공연 중간마다 배우들은 “이것도 공연이 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것도 공연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매번 스스로 되묻는 것이다.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 버리는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아, 이것도 비평이 되나? -막 만든 춤 | 송지연 : 관객과 예술가의 경계가 무너지는 체험형 전시 + 즉흥 퍼포먼스 막 만든 글 가끔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너무 좋은 것들이 있다. 내게는 고양이가 그렇다. 사람들은 내게 왜 고양이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귀여워서? 아름다워서? 엉뚱해서? 맞다. 고양이는 귀엽고 아름답고 엉뚱하다. 하지만 그게 고양이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는 아니다. 사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냥 좋았다.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린 것도 아닌데, 고양이를 마주하기 전부터 내 마음은 고양이가 좋다고 외치고 있었다.이 공연은 고양이와 닮았다. 좋은 이유를 찾기도 전에 이미 좋아하게 되었다. 사랑에 빠졌다. 가끔 사랑에 이유가 필요하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그래도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나도 예전에는 ‘그냥’이라는 말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얼버무리기 위함이거나, 부끄럽기 때문이거나, 스스로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냥 좋은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좋아서 좋은 이유가 생긴다. 좋아하기 때문에 좋은 점이 늘어난다.공연은 아름답게 꾸며진 공간을 자유롭게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카펫으로 무대가 명확하게 구분된 바닥은 문 없이도 무대로 입장하는 느낌을 준다.무대에는 수조가 있다. 체중계가 있고, 책이 놓여 있다. 바닥에는 다양한 모습의 선이 그려져 있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칠판처럼 생긴 낙서할 수 있는 구조물이 있다. 구석에는 독특한 옷이 있고, 벽과 벽 사이의 공간에는 양말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길잃은 로봇청소기가 공간을 돌아다닌다. 사람보다 큰 빈백 소파가 곳곳에 놓여있다. 포스트잇과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하얀 벽이 보인다.먼저 선을 따라 걸어본다. 내 보폭보다 좁은 짧은 선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수조에 손을 넣어본다. 물에도 촉감이 있었던가? 수조를 가득 채운 개구리알 덕분에 물에 촉감이 생겼다. 물속 오브제를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스스로 부력을 조절할 수 없는 물건은 물에 가라앉거나 떠 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촉감이 있는 물에서는 어디든 위치할 수 있다. 세상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 작은 수조에 담겨있는 것 같다.칠판에 마구잡이로 그림을 그려본다. 인생 그래프, 자화상, 글씨, 구름 등으로 칠판이 채워진다. 그림에는 아무런 기준이 없다. 그 순간에만 떠오르는 것들. 막 만든 그림이다. 난잡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훨씬 다채로운 작품이 완성된다.이번에는 길 잃은 로봇 청소기 뒤를 따라가 본다. 어떤 목적지에 닿는 일은 없다. 그저 계속 움직인다. 가끔은 센서가 고장 난 듯 제자리를 빙빙 돌기도 한다. 자주 벽에 부딪힌다. 하지만 로봇 청소기는 움직이기 위해 애쓴다. 길이라는 건 로봇 청소기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녀석은 다이소에서는 가장 비싼 물건이지만 세상에서는 고작 오천원짜리 로봇이다. 나도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서 비싼 물건이 된 기분을 느끼는가. 무대 구석에는 작은 옷장이 있다. 천이 치렁치렁 달린 모자와 옷이 걸려있는데, 그 모자를 쓰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내 발과 내 발 주변의 발이 전부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누군가와 부딪치는 건 실례이니 앞이 보이는 이들이 나를 피해 갈 수 있도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여본다. 고요한 춤을 춘다. 관객이지만 공연의 일부가 되는 느낌을 만끽한다.나는 춤을 잘 추지 않는다. 부끄럽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내 안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움직임을 시작했을 때 이미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참을 퍼포머인 척 움직였다. 관객분들, 속여서 죄송합니다. 관객도 공연의 일부라지만, 의도치 않게 정말 공연의 일부가 되어버렸네요.그때를 떠올리자 부끄러움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아, 나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 마법 모자가 필요하다. 그 모자를 쓰고 살 수만 있다면 세상이 더 밝아질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모자를 만든 사람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춤을 추는 건 두려운 일이다. 나는 몸치, 박치, 음치다. 내 엉성한 움직임을 보고 싶지 않다. 남들이 보는 건 더 싫다. 하지만 이 끓어오르는 욕망은 무엇이란 말인가? 관객으로 남고 싶지 않다. 퍼포머와 함께하고 싶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저 사람의 몸에 들어가고 싶다. 자유롭게 온몸을 움직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온기가 전혀 식지 않은 막 만든 춤의 뜨거운 열기를 함께 느끼고 싶다.나는 관객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척 몸은 가만히 두었지만, 사실 춤을 추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슬프지 않은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막 만든 춤을 추는 중에 퍼포머는 모든 관객과 접촉한다. 아주 사소한 맞닿음으로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아무도 무대에 난입하지 않았지만 아마 우리는 함께 춤을 추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경험은 어떤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문장 속에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 원통하다. 공연을 보고 그 느낌을 어디든 담아두고 싶었다. 변기통이라도 괜찮다. 스마트폰이나 돈 따위가 변기보다 더럽기 때문은 아니다. 이 마음을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안타깝게도 나는 분명 이 강렬한 감정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다만, 그보다 더 분명한 건 감정을 잊더라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이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언제나 그랬다. 사랑은 결코 완벽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막 만든 춤은 사랑스러운 작품이다.사랑이라는 단어를 몰라도 사랑을 할 수 있다. 맞춤법을 몰라도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만드는 글을 쓸 수 있다. 이 공연도 그렇다.글을 쓰면서도 몸을 이리저리 몰래 움직여본다. 아, 역시 무례하지만 무대에서 함께 춤이라도 출 걸 그랬나.회차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퍼포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춤도 제목처럼 즉흥이다.즉흥. 세상에 즉흥이 아닌 게 있을까? 지금 떠오른 생각도 즉흥이고, 몇 년 전에 세운 계획도 결국 즉흥이다. 수십 년을 갈고 닦은 복수의 칼날도 세상 밖으로 꺼내는 순간 즉흥이 되어버린다.현재를 말하는 순간 과거가 된다는 이야기처럼 ‘현재’라는 건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우리는 존재하는지 알 수도 없는 현재를 살아야만 한다. 즉흥 인간으로 살아야만 하는 셈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온몸으로 나와 내 주변의 세상을 충실히 감각하며 사는 것뿐이다. 수조 속 개구리알 덕분에 물에 촉감이 생긴 것처럼,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만지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퍼포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그런 이야기를 펼쳤다.“나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았다. 바로 그때 당신의 움직임이 내 춤이 된다. 이 뜨거운 춤을 식기 전에 당신에게 보여준다. 당신이 입고, 쓰고, 움직인 모든 것들을 담아, 당신에 대한 마음을 담아 막 추었다. 뜨겁게.”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주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내 움직임을 보고 뜨거운 춤을 보여준다는 건 더 기쁜 일이다. 공연을 보고 나도 막 만든 글을 쓰고 싶었다. 보답하고 싶었다. 걱정하는 시간마저 줄여 글을 썼다. -gps(global positioning story) | 민수민정: 사운드 – 미디어아트를 바탕으로 한 사운드 프로젝션 맵핑 퍼포먼스 길 잃은 자를 위하여 화이트 큐브. 빈 벽은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지만 막막함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어떤 올림픽 종목에는 ‘마의 벽’이라고 불리는 기록이 있다. 예컨대 마라톤의 마의 2시간, 스피드 클라이밍의 마의 5초의 벽, 여자 높이 뛰기 마의 벽 2m 10cm. 누군가는 넘을 수 없다고 굳게 믿는 거대한 벽.조금 더 일상으로 들어가 보자. 비행기는 어떤가? 비행기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하늘을 날아서 이동한다는 건 막막함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하늘을 날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수많은 비난을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꿈을 꾸지 않았다면 우리는 짧은 연휴에 해외여행을 다녀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는 여전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누군가 벽을 뛰어넘는 순간 ‘마의 벽’이라는 단어는 제 힘을 잃어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다른 벽도 도미노처럼 같이 무너지기도 한다. 꿈이 꿈을 낳는 셈이다.갤러리 아미디에 처음 갔을 때, 하얗고 작은 벽은 막막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여러 부분이 직각으로 꺾이고 튀어나와 있었기에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공간이라 생각했다. 절대적으로 좁은 면적은 예술가에게 한계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종의 마의 벽이리라!민수민정은 하얀 마의 벽을 아주 쉽게 뛰어넘었다. 민정은 점과 빛으로 흰 벽을 채웠고, 민수는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을 소리로 채웠다. 공연이 시작되자 ‘이 공연은 여기서 해야만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식 속의 갤러리 아미디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작지만 귀엽지는 않은 내 상상력의 한계가 음속과 광속 그 사이의 속도로 상쾌하게 부서졌다.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넓어졌다.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하늘인 줄 알았던 게 사실은 천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결국 개인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천장이 무너지는 순간 세상은 한없이 넓어진다.흰 벽이 다채로운 비디오 아트로 채워진다. 벽에 비가 내린다. 우주와 뉴런을 닮은 장면이 지나간다. 이윽고 소용돌이. 공간도 함께 돌아간다. 갤러리 아미디는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민수는 파도 소리가 나는 악기를 관객에게 전해준다. 누군가는 악기를 받아 연주하고, 다른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관객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민수와 민정으로 가득 찬 공간을 온몸으로 느낀다. 비어 있던 공간이 물로 채워진다. 물속에서 길 잃은 자의 이야기가 들려온다.“타국에서의 나는 겉과 속이 일치한 완벽한 이방인이다. 그리고 완벽한 이방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문득 한국에서의 나는 불완전한 이방인임을 깨달았다. 정해진 기준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어딘가에 걸려 넘어진다. 나의 이야기들은 계속 어딘가에 맞춰지고 잘려 나간다.”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가 느낄 두려움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정도로 멋진 사람이 길을 잃는다면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어떤 방황은 방황으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멋진 사람의 방황은 결코 방황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 나도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연을 하는 게 이렇게 멋있는 일이라면 삶을 공연에 내던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나 역시 한국에서 불완전한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이들이 옳은 길, 현명한 길, 빠른 길, 좋은 길, 틀린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학생은 공부해야 하고, 대학을 가야 하고, 졸업 후에는 취업해야 한다는 그런 진부한 이야기냐고? 맞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다.진부한 이야기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완전한 방황을 하기 어렵다. 불완전한 이방인으로 살거나 스스로를 세상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선택지가 주어진 느낌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좌표가 찍혀버린다. 잠깐 진부한 상상을 해보자.어느 날 먼 곳에 좌표가 하나 찍힌다. 시스템은 내게 가장 빠른 길로 가라고 명령한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좌표가 하나라면 피타고라스의 법칙은 필요 없다. 그가 쓸모없는 법칙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하지만 길 중간에 산이 생겨버린다면 어떨까? 올곧게 앞으로만 나아간다면 높은 산을 올라야만 한다.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릴 수 있다.저 멀리 호랑이가 보인다면? 가만히 숨어 먹이를 다 먹고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흔히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하는 칠레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일까? 전지전능한 챗 gpt님에게 물어보자.“gpt님, 칠레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인가요?”“삐리삐리~ (출처 : <국립극단원> - 매머드머메이드) 대한민국에서 칠레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의 최단 경로는 지구의 구형 형태를 고려한 ‘대원’ (great circle) 경로를 따릅니다. 대원 경로는 두 지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를 제공하는 경로로, 일반적으로 직선 경로보다 더 효율적입니다.”감사합니다 gpt님. 이번에는 항공권을 검색해 보자.[서울 -> 칠레 최단 경로][인천국제공항 ->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 -> 산티아고 국제공항 = 경유 1회, 환승 시간 2시간 15분, 총 소요 시간 24시간 10분]대원 경로, 최소 환승, 최단 경로. 삶에도 그런 게 존재할까? 아니 그보다 좌표가 찍혔다고 하여 꼭 거기로 가야만 하는 걸까? 산에 오르다 산의 아름다움에 반해 산중턱에 사는 인간이 된다면 실패한 삶인가? 종착점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나.민수민정은 세련된 방식으로 그 물음에 답을 던진다. 길을 잃는 것이야말로 옳은 길을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함께 길을 잃자고. 종착점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3) 지혜-어쩌라고 | 64j(줄) : 야외에서 펼쳐진 차이니즈 폴 서커스키오스크는 어려워 | 프로젝트팀 얼레벌레 : 지독한 컨셉의 관객참여형 연극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 8월 16일, 하루에 두 공연을 관람했다.먼저 64j의 <어쩌라고> 공연은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다니는 신촌 스타광장에서 펼쳐졌다. 거대한 폴 앞으로 두 사람이 등장하며 공연이 시작된다. 커다란 라디오에서는 사연이 흘러나오고, 그 안에서 콩주머니와 공이 꺼내진다.두 사람은 공연 내내 공을 먹기 위해 움직인다. 한 사람이 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다른 한 사람은 공을 쟁취하기 위해 팔을 뻗는다. 공연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공에 대한 욕심이 커지고 과격한 몸짓과 함께 감정도 깊어진다. 공을 쟁취하고 한입 베어 물고, 빼앗고 빼앗기고, 던지고 노려보고, 올려다보고 화도 내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공을 먹길 원하는 두 사람은 친구 같기도, 부모와 자녀 같기도, 형제 같기도, 남자와 여자 같기도 하다. 동물처럼 네 발로 걷기도, 통나무처럼 쓰러지기도, 번지드롭처럼 올라갔다 떨어지기도 한다. 무엇인지 모르겠다가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두 사람의 결말은 ‘함께’라는 것. 손을 맞잡고 일어나 공을 먹여주고 웃으며 끝이 나는 해피엔딩이었다.욕심을 내는 것도, 경쟁하는 것도, 질투하는 것도 결국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두 번째 관람한 공연은 프로젝트팀 얼레벌레의 <키오스크는 어려워>.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예술가가 파격적인 비주얼로 관객을 맞이한다. 태블릿의 탈을 쓴 사람을 만나 키오스크로 티켓을 발권하고 천막 안으로 입장하면 둥글게 마주 보는 책상에 앉아 키오스크 관련 종이 설문지를 작성해야 한다. 공연장 중앙엔 색색의 실타래가 이어져 있는 커다란 압정 판이 흥미를 끌었고, 벽 한쪽을 차지한 스크린에서는 캐릭터 20 문답 영상이 통통 튀는 음악과 재생되고 있어 웃음이 절로 나게 했다. 공연은 관객 참여형으로 진행되었다. 공연 속 관객은 easybusy kiosk 3.0 베타테스터가 되고 예술가는 베타테스트 시연 안내자 ‘키오와 스크’가 된다. 그렇게 공간은 키오스크 시스템을 시범하는 점잖은 장소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문제로 키오스크 시연이 불가해졌고 베타 테스터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시스템이 다시 가동하게 만드는 연극이었다.베타테스터는 주어지는 질문과 상황에 답한다. 그것은 체크 표시가 되기도, 실이 되기도, 손 글씨가 되기도 했다. 질문에 답하는 베타테스터는 모두 ‘키오, 스크’의 도움을 받는다. “실이 꼬였어요.”, “더 이상 오른쪽으로 갈 수 없어요.”, “다 작성했어요.” 키오와 스크는 내가 처한 문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해 빠르고 친절하게 도움을 준다. 두 사람이 지체 없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편리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며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키오스크. 하지만 정말 편리할까? 효율적일까? 키오스크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결국 찾게 되는 건 사람이고 나 역시도 생각보다 그러한 경험이 많았다는 것. 사용할 줄 몰라서 생기는 문제보다 올바르게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영수증이 나오지 않거나, 주문한 음식이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면 누구나 당연히 사람을 찾을 테니까.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충돌과 오류는 계속된다. 사람은 사람을 찾는다.64j의 <어쩌라고>는 들고나온 라디오를 활용해 ‘어쩌라고’라는 말에 걸맞은 라디오 사연 소개 음성을 준비했지만, 역동적인 움직임과는 어울리지 않아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프로젝트 얼레벌레의 <키오스크는 어려워>는 공연 전 보여준 파격적인 시각 콘텐츠에 비해 오로지 키오스크의 불편함이 의도된 관객의 답변으로만 마무리 짓는 결말이 허무하고 아쉬웠다. 하지만, 이 아쉬움이라는 감정 역시 공연을 만든 사람과 공연을 보는 사람이 있어야 생겨나는 것이다.예술가는 관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관객이 됨으로써 예술가와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로 남는다. 관객이 없는 공연은 존재할 수 있을까? 독자가 없는 글은 존재할 수 있을까? 공연도, 글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시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